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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 스토리텔링(1) 신선을 부르고 신선과 만나던 순천의 동천(東川)
  • 2021-01-16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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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


 

동천 스토리텔링(1)


신선을 부르고 신선과 만나던 순천의 동천(東川)

 

 

생태도시 순천의 역사적 맥락은 통일신라 때부터 신선의 고을로 알려진 순천의 정체성에서 나왔다. 신선 세계의 청신함이 바로 지금의 생태도시로 나아갈 수 있었다.

<신선을 부르고 신선과 만나던 순천의 동천>의 이야기는 순천지역이 신선의 고을이었고, 후백제를 지나면서 진례산(進禮山, 현 여수 영취산) 성황신 김총(金惣), 해룡산(海龍山) 산신 박영규(朴英規), 인제산(麟蹄山) 산신 박난봉(朴鸞鳳) 등 삼산(三山)과 삼신(三神)의 의식이 생겼고, 조선시대에는 지리산과 한라산 사이에 위치한다는 지리적 인식과 함께 도교에서 말하는 봉래・방장・영주의 삼신산(三神山)을 현 용당동 삼산(三山)에 반영하였다. 이러한 선향 순천 인식은 신선을 부른다는 환선정(喚仙亭)에 투영되어 나타났으며, 1871년 신선을 만난다는 우선정(遇仙亭)까지 건립되었다. 이 때문에 동천은 곧 선계의 공간이었고, 그곳에서 탈속을 경험하려 하였다.

 


 

1. 신선의 고을[仙鄕] 순천

 

조계산 선암사(仙巖寺)의 유래에 대해 채팽윤(蔡彭胤,1669-1731)은 「선암사중수비」에서 선인(仙人)이 바둑을 두던 바위 곁에 선각국사(先覺國師) 도선(道詵,827-898)이 암사를 중창하고 이름을 붙였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통일신라시대부터 이미 ‘순천’은 신선과 관련성이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선암사에는 승선교(昇仙橋), 강선루(降仙樓), 대선루(待仙樓) 등의 신선과 관련한 건물명이 있다. 또한 선암사 아래에는 죽학(竹鶴)・무학(舞鶴)의 지명도 있다. 뿐만 아니라 삼신산(三神山)은 봉래산・방장산・영주산을 말하는데, 현 순천시 상사면에는 이수광이 『승평지』에서 언급한 봉래산(蓬萊山)도 있다.

이와 같이 사찰의 명칭이나 지명으로 전해지는 신선 관련 내용은 조선시대 남원부사를 역임하고 송광사에 머물기도 했던 유몽인(柳夢寅)이나 순천부사 성이호(成彛鎬) 등에 의해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들은 순천이 지리적으로 방장산(지리산)과 영주산(한라산) 사이에 위치하고 풍광이 수려하므로, 신선이 유식(遊息)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하였다. 이에 문인들은 작품에서 순천지역을 선향(仙鄕)・선구(仙區)・선계(仙界)・선도(仙都)・영경(靈境) 등으로 표현함으로써, 그런 인식을 동조하였다.

예컨대 순천부사 이수광은 그의 시 「공북당(拱北堂)」 수련과 함련에서 “아름다운 강남 고을에, 맑고 그윽한 공북당. 사람들 태곳적 같이 순수하고, 풍속은 선향을 말미암아 순후하네.[佳麗江南地, 淸幽拱北堂. 人民猶太古, 風俗自仙鄕.]”라고 하였다. 또 1618년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겨와 1619년 3월 23일 세상을 떠난 간정(艮庭) 이유홍(李惟弘,1567-1619)은 「차환선정운(次喚仙亭韻)」 시의 수련에서 “두류산 정기가 앞 처마를 압도하고, 선향에서 부사는 관리로 숨어 사네.[頭流山氣壓前簷, 分虎仙鄕吏隱兼.]”라고 하였다.

한편 진례산(進禮山, 현 여수 영취산) 성황신 김총(金惣), 해룡산(海龍山) 산신 박영규(朴英規), 인제산(麟蹄山) 산신 박난봉(朴鸞鳳)으로 인해, 순천지역은 후백제와 고려시대부터 삼산(三山)과 산신이 있는 고을로 인식되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지역민은 삼산과 산신을 선향 순천 인식과 결부하여,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을 대상화한다. 현 용당동 소재의 야트막한 산봉우리 세 개가 이어진 산은 원래 명칭이 원산(圓山)인데, 1872년 순천부읍성지도에서는 ‘三山’으로 개명되어 있다. 이를 보면 1800년대 순천 지역민은 ‘삼산’하면 기존의 세 곳 산신이 있는 산이 아닌, 용당동의 그 산을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조선말기~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호운(湖雲) 임영모(任永模)는 「환선정」 시 미련에서 “처마 사방으로 환희 트고 멀리 석양 지는데, 삼산이 지척이나 신선은 보이지 않네.[四簷寥廓斜陽遠, 咫尺三山不見仙.]”라고 하였다. 그가 말한 ‘삼산’은 신선이 사는 삼신산과 환선정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바로 보이는 용당동의 삼산이다.

이상과 같이 통일신라시대부터 형성된 선향 인식이 19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점을 미루어보면, ‘선향 순천’이란 공간 인식으로 지역 정체성을 정의한다고 해도 결코 빈말이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2. 선계(仙界)로의 탈속을 꿈꾸며

 

사람들은 환선정을 다음과 같이 인식한다.

 

이수 가에 하나의 선정 있어서 有一仙亭二水涯

소강남이 소중화에서 으뜸이 되었네 小江南擅小中華

못 가엔 간혹 선유객 찾아오고 池邊或至乘槎客

교외에선 보리타작 소리 들리네 野外曾聞打麥家

누각의 학이 변해 황학이 춤추고 樓鶴變成黃鶴舞

뜰의 늙은 복숭아나무엔 벽도 달렸네 庭桃老作碧桃斜

삼산 아래요 승평읍성 동쪽에서 三山之下昇平左

천년을 우뚝 서 세속 시끄러움 끊었네 屹立千年絶俗譁

 

이는 초산(樵山) 최만호(崔萬鎬)의 시다. 환선정에 대해 순천의 위상을 드높일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가진 곳이고,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과 중의적으로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삼산’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것과 정자명에 ‘환선’이 있는데서 착안하여, 세속의 번뇌를 끊을 만한 장소라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와 명예 등 세속의 욕망을 추구하다 지친 인간에게 있어 현실세계를 떠나 불로장생하며 산수를 즐기는 신선의 풍모는 동경과 끌림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환선정을 등람한 시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호남의 남쪽 바닷가 변방이 湖嶺之南海以邊

가을빛으로 물들어 온통 찬란하네 捿將秋色共巍然

신선은 별세계 유람에 학을 타고 仙遊別界應驂鶴

객은 청도에 서니 신선인 듯 황홀하네 客立淸都怳蛻蟬

푸른 숲에 비 개니 안개너머 절 있고 碧樹晴分烟外寺

놀잇배 저물녘 물속 하늘에 떠있네 彩檣暝戞水中天

난간에 기대 부구의 소매 잡고자 하니 憑欄欲挹浮丘袂

아득히 삼산이 석양 앞에 있네 縹渺三山落照前

 

이는 한기유(韓耆裕, 1762-?)의 시다. 그는 1811년 8월부터 1813년 8월까지 순천부사를 역임하였다. 한기유는 단풍으로 물든 가을에 도착한 부임지 순천에 대한 첫인상을 ‘淸都’와 ‘蛻蟬’으로 표현하였다. ‘청도’는 맑은 도읍이란 말로 순천을 지칭하는데, 여기서 ‘淸’자는 도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선경인 옥천(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의 삼청경(三淸境)을 연상케 한다. 또한 매미가 허물을 벗는다는 뜻의 ‘태선’은 당(唐) 한유(韓愈,768-824)가 「사자연시謝自然詩」에서 “문을 들어가도 보이는 것이 없고, 갓과 신발은 매미가 허물을 벗은 것과 같네. 모두 신선의 일이라 하니, 분명하여 믿고 전할 만하네.[入門無所見, 冠屨同蛻蟬. 皆云神仙事, 灼灼信可傳.]”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해탈하여 신선이 된 것을 의미한다.

진(晉)의 곽박(郭璞)은 상고시대의 신선 부구(浮丘)와 홍애(洪崖)를 거론한 「유선시(遊仙詩)」에서 “왼손으론 부구의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론 홍애의 어깨를 치네.[左挹浮丘袖, 右拍洪崖肩.]”라고 하며, 세속을 벗어나 신선과 어울려 지내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였다.

순천에 대한 첫인상에서 신선을 떠올린 한기유는 석양 무렵 환선정에 올라 삼산을 바라보며 마침내 곽박의 시구처럼 부구의 소매를 당기고 싶다고 함으로써, 신선과 어울려보고 싶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었다. 신선과 어울리려 한다는 것은 자신 또한 신선이 되려 하는 것의 다름 아니다.

 

정자 아스라이 공중에 매단 듯하니 亭臨迢遞若空懸

편액에 적힌 이름이 딱 맞는 듯하네 板額題名的有然

옛 언덕 봄빛은 안개 낀 가는 버들이고 古岸春容烟細柳

작은 못 가을빛은 달빛아래 향기나는 연꽃이네 小塘秋色月香蓮

산수를 즐김은 맛을 잊은 데서 기인하고 樂耽山水因忘味

연하를 실컷 마심은 돈이 들지 않네 剩飽烟霞不用錢

오랜 세월 공연히 진세 허물에 빠졌는데 百劫空空塵累沒

올라 노닐다 문득 신선을 벗한 줄 알았네 登遊忽覺伴神仙

 

이는 임태휘(任泰徽)의 시다. 그는 동천 가에 우뚝 솟은 환선정을 등림해서는 정자의 명실이 부합한다고 여겼다. 또한 버들가지 드리운 동천에 안개 낀 봄날과 지당에 핀 연꽃을 비추는 가을밤 달을 환선정의 봄가을을 대표하는 승경으로 꼽았다. 평소 풍월무주를 인식하고 있던 그는 공자가 제(齊)나라에서 소(韶) 음악 듣고는 그 음악을 배우는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알지 못했다.”라고 한 것처럼 망미(忘味), 즉 음식 맛이 어떠한지 모를 정도로 산수를 즐겼다. 그 와중에 지난날 삶의 부질없음을 돌아보며 탄식하다보니 어느새 신선과 짝한 듯한 자신을 깨닫게 된다. 결국 임태휘는 이 시를 지어 살아온 삶의 후회와 반성을 통해 신선이 되었으면 하는 궁극의 바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상세계에서의 신선이 되고 싶다는 바람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인들은 현재 머물고 있는 인간세상의 현실 속 신선이 되고자 한다.


하서 대문장이 놀잇배에 올라 술 취해 河西詞伯醉乘船

한 가락 양춘곡으로 고현에 화답했네 一曲陽春和古賢

기녀가 읊음을 재촉한 건 꿈 깬 뒤고 雲雨惱吟殘夢後

용사처럼 붓을 내달린 건 술 깨기 전이네 龍蛇驅筆未醒前

천년의 경치 좋은 강산이 여기 있건만 千年形勝江山在

풍류가 세속 일에 끌림이 그 얼마였던가 幾日風流世累牽

문득 숲으로 들어가 영철과 마주하며 便向林間對靈徹

지상의 신선이 되었으면 좋겠네 甘從地上作神仙

 

이는 송인수(宋麟壽)의 시다. 송인수는 1542년 10월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정직하고 강직한 그는 1543년(45세) 2월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임한 그해 7월에 전라도 각 고을에 사서오경을 간행하였는데, 이로써 교화를 밝히고 풍속을 바르게 하며 학교를 부흥하고 인재를 키우려 하였다.

그는 이듬해인 1544년 환선정을 준공한 순천부사 심통원의 초대로 김인후와 더불어 환선정에 모여 선유하며 유흥을 즐겼다. 당시 김인후는 자기보다 선배인 송인수의 운자를 차운하여 일필휘지로 써내려갔고, 송인수는 그의 시를 초(楚)나라의 고상한 가곡인 양춘곡(陽春曲)이라며 높이 평가하였다. 이와 같이 셋이 뱃놀이하고 술잔을 주고받고 시를 수창하며 희락하던 중에, 중앙정계에 있다가 지방관으로 좌천되며 환로(宦路)의 세파에 시달린 송인수는 문득 자신이 ‘喚仙’이라 정자에 있음을 돌아보며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당(唐)나라 때 시승(詩僧) 영철(靈徹)의 고사를 인용해 은거의 의중을 드러내었다.

영철은 강서태수(江西太守) 위단(韋丹)과 교분이 두터웠다. 위단이 영철에게 “관찰사 업무 번다해 한가한 날 없으니, 덧없는 인생 무상하기가 구름 같을 뿐이네. 장형(張衡)처럼 은거할 계획 세웠으니, 오로암 밑에서 반드시 그대와 함께 하리.[王事紛紛無暇日, 浮生冉冉只如雲. 已爲平子歸休計, 五老巖前必共君.]”라고 하였다. 이에 영철이 화답하기를 “연로한 몸 한가하여 세상일 없으니, 베옷 입고 풀밭에 앉아도 지낼 만하다네. 만나는 이들마다 벼슬 그만둔다 하지만, 숲에서 그런 사람 하나라도 본 적 있던가.[年老身閒無外事, 麻衣草坐亦容身. 相逢盡道休官去, 林下何曾見一人.]”라고 하였다. 즉 영철은 대다수 속세의 관료들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제 은거하지 않는 그들의 이중성을 비꼬고 있는 것이다.

송인수 또한 영철의 말처럼 실제로 은거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환선정에서 환로의 세파를 잠시라도 잊기 위해 지향하고자 하는 탈속의 경지로 은거하는 지상선(地上仙)임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들은 지상선 같은 현실세계 속 신선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원래 자신이 신선세계에 있다가 인간세상으로 귀양 온 것이라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백 척 화려한 난간 물가에서 붉은데 百尺雕欄襯水紅

짓는 당일 귀신이 도와준 공 있었네 經營當日鬼輸功

금인장과 자수는 인간세상의 손님이고 金章紫綬人間客

녹발과 청동은 물외의 늙은이로다 綠髮靑瞳物外翁

백학 곁에서 잔에 마시는 건 천고의 달이고 盃吸鶴邊千古月

붕새 등에서 소매 끄는 건 가을바람이네 袖携鵬背九秋風

누가 알리, 내가 본래 신선의 벗인데 誰知我本神仙侶

귀양 와 오히려 이곳을 찾을 줄을 謫下猶能向此中

 

이는 이수광(李睟光,1563-1628)의 시다. 그는 1616년 10월부터 1619년 3월까지 순천부사를 지냈다. 금장(金章)은 황금으로 만든 도장인 금인장(金印章)이고, 자수(紫綬)는 자주색 또는 붉은색 도장끈을 가리킨다. 둘 모두 고관대작이 소지하는 물건으로 벼슬을 비유하는 하는데, 여기서는 부사의 직책에 견준 것이다. 녹발(綠髮)과 청동(靑瞳)은 송나라 소식이 「贈仲素寺丞致仕歸隱潛山」 시에서 “잠산의 은군은 금년 나이 일흔넷인데, 윤기 있는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로 세상일 사절하였네.[潛山隱君七十四, 紺瞳綠髮方謝事.]”라고 한 데서 따온 말이다. 녹발과 감동은 선인(仙人)의 건강한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이수광은 바람 불고 달 뜬 가을밤에 환선정을 찾았다. 그는 자신을 감동녹발의 신선 형상으로 세속을 벗어난 물외옹(物外翁)으로 간주하고, 자신이 맡고 있는 부사의 직책은 신선에서 인간세상으로 귀양 온 자신에게 잠시 주어진 임무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자신이 본래 신선의 짝 또는 신선의 벗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귀양 온 인간세상에서 벗인 신선을 찾기 위해서는 신선을 부를 수 있는 곳으로 가야하고, 그곳이 바로 환선정을 찾은 이유라고 설명한다. 탈속에서 환속으로, 다시 속세에서 탈속으로의 지향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환선정을 등람한 시인들은 지리적으로 삼산(三山)이 있음과 ‘喚仙’ 정자명에서 환선정을 세속의 번뇌를 끊을 만한 장소로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선계로의 탈속을 지향하는 의식을 신선과 어울리기, 인간세상 속 신선이 되기, 은거하는 지상선(地上仙) 되기, 신선세계에서 귀양 온 처지라 환선정에서 신선인 벗 부르기 등으로 표출하고 있다.

 

 

* 이상의 내용은 김현진(金炫鎭), 「순천지역 누정 제영시 연구」(2018), 경상대학교 박사학위논문을 참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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